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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소설

[단편] 자루 안에서

엠코 2012. 2. 15. 16:25


  일단 동생의 몸부터 챙겼다. 제일 따뜻한 자리라고 생각하고 뉘었는데 불안함은 채 가시질 않았다. 거의 맨 땅에 가까운 바닥이었지만 그래도 바깥보단 훨씬 나은 상황이었다.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외투를 벗어 누워있는 동생의 몸에 살포시 덮어주었다. 그제야 약간 안심이 되었다. 내 몸에서 오들오들 떨려오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럭저럭 참을만 했다.
  연약한 몸에서 가쁜 숨소리가 들려왔다. 가여움과 동시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여기까지 업고 오는 동안 바로 뒤에서 들려오던 그 숨소리인데 지금이 훨씬 더 가쁘게 들렸다. 보온병을 꺼내 따뜻한 차를 먹여주고 싶었지만 동생은 앉을 힘조차 없어보였다. 나는 동생의 바로 옆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나무집은 생각보다 튼튼했다. 멀리서 봤을 땐 거센 눈발에 맥을 못 출 것처럼 허름한 모습이었는데 예상과 달리 내부는 비교적 따뜻했다. 적어도 하루 정도는 쉬다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와 동생이 자리잡은 곳은 양쪽에 앉은키보다 높은 나무 선반이 놓여있어 찬공기가 그나마 덜 들어왔다. 잠시만 앉아있다보면 주변을 감싸도는 체온으로 조금이나마 몸이 따뜻해질 것이다. 이대로 몇 시간만 자둔다면 그나마 정신이 조금 맑아질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한지 몇 분이 지났을까. 정면을 응시하던 나는 다시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내부를 돌아다니면서 도움이 되는 물건을 찾아볼 셈이었다.
  지붕은 세모에 몸은 네모난 집의 형태를 보고서 시골 오두막이라고 생각하고 들어왔는데 막상 보니 집보단 창고에 가까웠다. 식량은 없고 대부분이 잡동사니들이었다. 식량이 아니더라도 뭔가 하나 정도는 쓸만한 게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걸어봤지만, 쓸모없는 희망이었다. 애석하게도 현재의 우리 처지에 도움이 되는 물건은 단 하나도 없었다.
  천천히 동생의 곁에 다가가 가방을 집어들었다. 바로 옆 선반 위에 올려놓고 조용히 지퍼를 당겼다. 상황이 상황이었던 만큼 챙겨온 건 얼마 되지 않았다. 달짝지근한 오미자차를 담아놓은 은색 보온병, 평소 즐겨듣는 음악을 넣어놓은 MP3 플레이어, 그리고 내가 가장 인상깊게 읽었던, 그러나 집을 나와 여기까지 오는 동안 차마 되짚어 읽어볼 틈이 안 났던 책 한 권, 그리고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기타 등등의 물건들까지. 사실상 몇몇 개를 제외한 나머지는 이미 이 가방 안에 들어있던 상태로 끌려나온 것들이다. 가져오고 싶었던 물건들은 대부분 집에 있었다. 지금은 없을지도 모르는 우리 집.
  끌려오다시피 집을 나온 그 날. 한동안 티없이 맑았던 하늘은 그 날을 시작으로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많은 눈을 쏟아부었다. 그 날, 나는 눈처럼 새하얗고 창백한 얼굴로 급하게 짐을 싸는 부모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통신 매체가 불통이 된지 하루만에 결정된 일이었다. TV는 어떤 채널을 돌려도 요란한 노이즈와 소음 뿐이었고 인터넷과 전화도 불통이 되어버렸다. 집 밖의 다른 이야기를 전해들을 수 있는 소통의 창구가 단 하나만을 남겨두고 모두 사라져버린 것이다. 남은 하나는 물리적인 소통이었다. 일이 벌어지자마자 부모님은 윗층과 아랫층을 전전하며 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한참을 얘기 나누는 데에 소모했다. 그 이야기들을 우리에게는 말해주지 않았다. 그게 하루를 넘어갔고, 집을 나서기 10분 전에야 결론이 내려졌다.
  - 우린 곧 여기를 떠날 거란다.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일단 따라줬으면 좋겠구나.
  그렇게 우리는 피난길에 올랐다. 대부분의 가족들이 자가용 승용차를 타고 이동했지만 우리는 두 발로만 한참을 걸었다. 차가 없는 건 돈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값싼 물건이 아닌 이상 우리 가족은 절대 무언가 하나를 사는데 충동적인 마음을 갖지 않았다. 승용차도 굳이 몇 천만원 내고 살 필요가 있을까 하면서 가족들 간에 의견을 모아 여태까지 마련해놓지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후회할 법도 하지만 딱히 그런 생각은 없었다. 자가용이 아니더라도 이동 수단은 충분했다.
  전철은 그 날과 그 다음날, 이틀을 더 달리고 운행을 중단한다고 했다. 동생이 안내 방송을 듣고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 그럼 오늘 타는 지하철이 마지막이야? 앞으로 절대 못 타?
  장담할 수 없어서 굳이 대답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왠지 그럴 것 같았다.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그 날처럼 구슬프게 들려오기는 처음이었다.
  카드를 리더기에 올려놓자 나잇대에 맞춰 차감 액수가 뜨고, 이어서 만 원 정도의 잔여금이 표시됐다. 저 멀리 남쪽까지 내려가서 다시 올라오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액수였다. 계단을 통해 한 층 더 내려갔다. 평상시보다 많은 사람들이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북쪽행 열차와 남쪽행 열차를 모두 관할하는 역사였는데 마치 흑과 백을 보는 듯이 한 쪽으로만 사람들이 잔뜩 몰려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남쪽으로 가려 하고 있었다.
  걱정으로 심기가 불편했다. 이렇게 사람이 많다면 이번에 오는 열차를 타지 못할 수도 있었다. 오는 열차마다 사람이 꽉 차있다면 더더욱 큰일이었다. 아직까진 비교적 천진난만한 동생의 눈빛과 달리 나는 시간이 지체될수록 더욱 커지는 걱정으로 낯빛이 퍼렇게 변해갔다. 비록 내 두 눈으론 볼 수 없지만 분명 새파랬을 것이다.
  요란한 신호음과 함께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열차가 오고 있었다. 나는 동생의 손을 꼬옥 잡고 서서히 속력을 늦춰가는 열차를 바라보았다. 역사의 모든 사람들이 도착한 열차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사람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많았다. 어느 자리 하나 비어있지 않은 건 기본이었고 문 앞에도 몇 사람이 낑기다시피 붙어있었는데, 그 모습은 문이 열리면 그대로 와르르 쏟아져 나올 것처럼 가히 위태롭기까지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생각마저 허튼 생각임을 이내 깨달았다. 와르르 쏟아져나오기는 커녕,
  단 한 사람도 열차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았다. 문이 열렸는데도, 열차 안의 사람들은 마치 '나도 갈 길 있으니까 알아서 들어오세요' 하는 표정으로 역사의 사람들과 가만히 얼굴만 마주할 뿐이었다.
  - 안 탈거야, 누나?
  동생이 물었다. 이번에도 난 대답하지 못했다. 시선은 정면의 열차 문에 박혀 떨어지질 않았다. 어떻게든 타려고 자신의 몸을 힘들게 쑤셔넣는 사람들이 보였다. 포기하고 뒷걸음질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열차 안에서 갑갑함에 소리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머릿 속에 세 개의 질문이 떠돌아다녔다. 우리도 어떻게든 타는게 좋을까? 아니면 다음 열차를 기다릴까? 하지만 다음 열차가 와도 지금이랑 똑같으면 어쩌지?
  - 누나?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동생이 물었다. 나는 동생에게 시선조차 주지 못했다. 문이 곧 닫힐 것 같았다. 열차와 역사 사이에 어중간하게 서있는 사람이 있지만 문은 얼마 안 가 가차없이 닫힐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결국 다음 열차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하지만 다음 열차가 와도……
  "누나?"
  끙끙 앓는 듯한 목소리. 이어서 거센 바람 소리가 들렸다. 정신차리고 고개를 돌려보니 동생이 깨어있었다. 두 손 밑에 두었던 가방을 들어 조심스럽게 동생의 옆에 다가가 앉았다.
  "일어날 수 있어?"
  숨도 안 쉬고 회상에 잠겨있었던 모양이다. 목 안이 개운치 않아 말이 끝나자마자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동생은 일어나기 위해 상체를 조금씩 들어냈다. 내가 손으로 등을 받쳐주고서야 간신히 일어날 수 있었다. 일으켜 세운 몸을 뒤로 천천히 움직여 겨우내 벽에 등이 닿았다. 동생은 등이 벽에 닿자마자 차가움에 "헛!" 하고 외마디 탄성과 함께 몸을 움츠렸다. 나는 가방에서 보온병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빨간 단추를 눌러 딸깍 소리가 나자마자 동생이 옆에서 한기 어린 탄식을 내뱉었다. 뚜껑을 뒤집어 그 안에 오미자차를 천천히 따랐다. 따르자마자 적잖은 김이 나풀거렸지만 생각보다 따뜻해보이지는 않았다. 한참을 이동하는 동안 많이 식어버린 듯 했다.
  뚜껑을 동생에게 건넸다. 두 손으로 받아들더니 천천히 입가에 가져가서는 맛을 조금씩 느끼기 시작했다. 별로 뜨겁지 않다는 걸 알았는지 이내 목울대를 출렁이며 부드럽게 입 안에 털어냈다. 쩝쩝 하고 입맛을 다시더니 아쉬운 듯 말했다.
  "뜨뜻하게 마셔야 제 맛인데."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오미자차를 항상 따뜻한 상태에서 조금씩 맛을 느껴가며 마시곤 했다. 맛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느끼고자 하는 점도 있고 너무 빨리 마시면 금방 없어져서 아쉬운 탓도 있었다. 마트에서 작은 박스를 사와 그 안에 있는 믹스 봉지들을 물에 살살 털어내기만 하면 간편하게 먹을 수 있어서 그 맛이 그리울 때나 목이 칼칼할 때 자주 마시곤 했다. 문득 후회감이 몰려왔다.
  "믹스도 조금 챙겨왔어야 했는데…."
  이게 마지막 식량이라고 생각하니 감회가 남달랐다. 어쩌면 살아있을 적에 먹는 최후의 식량이 될 수도 있었다. 약간의 비상금이 있지만 무언가를 사먹는 건 불가능했다. 거센 눈발에 시야가 차단돼 멀리까진 볼 수 없었지만 이 곳은 분명 오지였다. 설령 이 근처에 마트가 있다고 해도 이 상황과 날씨에 문이나 열었을까. 날이 풀리는 대로 가장 먼저 찾아갈 곳은 역시나 마트가 되겠지만, 가능하면 문은 꼭 열려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문이 닫혀있다면 본능적으로 창문을 깨고 들어갈 수도 있겠지만, 과연 그 짓을 내가 할 수 있을지 나로써도 의문이었다.
  뚜껑을 닫고 가방에 집어넣었다. 한결 개운해진 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누구 집이야?"
  "집은 아니고. 창고 같은데 누가 버리고 갔나봐."
  "그럼 여기 먹을 것도 있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다 뒤져본 건 아니라서 확신할 수 없었지만 더 둘러봐도 식량은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어쩌면 이 창고의 주인이 식량을 포함해 필요한 것들만 모조리 가져가서 남는게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눈이 그치는대로 여길 떠날거야. 나가면 마트부터 찾아보자. 돈은 있으니까 사먹으면 돼."
  동생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표정에서 읽을 수 있는 감정은 명확했다. 슬픔. 조금 더 생각하면 어느 외딴 곳에 갇혀있음에서 오는 불안함과 배고픔 등에서 오는 괴로움, 그리고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 어떻게 보면 이건 내가 느끼는 감정이었지만 시선을 내리깔은 동생의 표정을 보고서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꼈다. 문득 그리워지는 누군가의 모습이 머릿 속을 헤매기 시작했다.
  수시로 덜컹거리는 소리 뿐이 들려오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낑겨 선 채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각자의 목적지에 열차가 도달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열차는 분명 한 역 한 역 계속 멈추고 문을 열었다 닫은 후 다시 출발하기를 반복했지만, 사람은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늘어났다. 더 이상 사람이 자리할 공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늘어났다. 얼마나 늘어났는지는 조금씩 더 달라붙는 타인들의 까끌까끌한 옷과 긴 머리카락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버틸만은 했지만 문제는 동생이었다. 5~6 센치 정도 더 작은 키의 동생은 흘낏 봐도 답답해보이는 표정이 눈에 바로 들어왔다. 나는 말없이 동생의 손을 꼬옥 잡고 있었다. 놓으면 그대로 동생하고도 멀어지게 될 것 같았다.
  어찌저찌 열차를 타는데는 성공했다. 역사에 도착하고 두번째로 온 열차였다. 첫번째 열차는 결국 타지 못했다. 두 열차 다 사람은 비슷하게 많았지만 계속 역사에서 시간을 보낼 수는 없다고 판단하고 다른 사람처럼 무작정 열차 안으로 몸을 들이밀어 겨우 탑승할 수 있었다. 지금은 왼쪽 문과 오른쪽 문의 사이 정중앙에서 어물쩡거리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부모님을 놓쳐버렸다. 첫 열차가 가고 정신차려보니 사라진 상태였다. 직접 보지는 못했기에 확신할 순 없었지만 첫번째 열차를 타고 먼저 떠나버리신 듯 했다. 왜 나와 동생을 같이 태우려 하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평소보다 사람이 더욱 붐비는 그 상황에서 다른 곳에 정신을 팔아버린 나는 뭘 하고 있었던걸까 하고 후회를 하기도 했다. 어디서 내리는지만 알았어도 그 역에 내려서 찾아다니면 됐을텐데 그마저도 부모님은 우리에게 알려주시지 않았다. 그래서 열차를 타는 내내 또 다른 불안함에 휩싸였다. 이제 믿을 건 지레짐작 뿐이었다.
  - 답답해도 조금만 참아. 몇 정거장만 더 가다가 사람들이 막 내리기 시작하면 그 때 같이 내리는거야. 알았지?
  그렇게 말하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묵묵히 어느 역에 도달하길 기다릴 뿐이었다. 정말 가만히만 있었다. 20분 정도를 그렇게 있었다. 그 사이에 지나간 역의 수는 정확히 9개였다. 중간에 대여섯 명이 의자에서 일어나 한 역에서 몸을 부딪혀가며 힘들게 내리는 모습을, 그리고 의자 근처 사람들이 잽싸게 비어버린 자리를 선점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사람이 움직이는 모습을 본 건 20분 동안 그 한번이 전부였다.
  환승역임을 알리는 음악이 울렸다. 이전까지도 환승역을 4번이나 지나쳤지만 이번에는 분위기부터가 달랐다. 사람들의 소곤거리는 소리가 늘어나면서 어느새 주변에는 술렁대는 목소리로 가득했다. 그리고 이어서 들려오는 안내 목소리.
  - 이번 역은 4호선, 경의선, 공항철도, 그리고 고속 열차로 갈아타실 수 있는……
  역 이름을 듣기도 전에 나는 여기 있는 사람들이 어디로 가려고 하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문이 열리고, 앞과 좌우, 그리고 뒤의 사람들까지 한꺼번에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운데에 있던 우리는 자연스럽게 떠밀리다시피 하며 열차 밖으로 나갔다. 문 밖에서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은 많아봐야 두세명이었다. 여기서 타는 사람들과 열차에서 내리지 않은 사람들은 대부분 더 남쪽으로 이동해 버스터미널로 향할 것이다. 그리고 이 역에서 하차한 사람들은 대부분 고속 열차를 통해 이동하려고 했다. 아마 부모님도 여기서 내리셨을 것이다. 일단 그렇게 생각하고 내렸지만 뭐부터 해야 할지 막상 답이 쉽게 나오질 않았다.
  계단을 통해 출구를 한 층 앞둔 로비까지 올라왔다.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한 출구를 향해 무더기로 몰려가는 모습도 보였고 근처 의자에 앉아 얘기를 나누는 사람들도 보였다. 이러나 저러나 모두 안색이 어두웠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겹쳐 들려오는 와중에 어딘가에서 안내 방송이 들려왔다. 사람을 찾는 방송이었다.
  - 경비실에서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실종자 대부분이 아동 또는 청소년이며 그 수가 많아 차례대로 이름을 호명하겠으니 해당되는 즉시 경비실로 오기 바랍니다……
  빈 의자에 앉아 우리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렸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호명되는 실종 아동의 수는 20명을 넘어갔다. 모두가 의도치 않게 부모 손에서 떨어지게 된 것일 테지만 그런 상황이 지금 이 시간에 벌어졌다고 생각하니 내 입장에서나 다른 아이들을 보는 제 3자의 입장에서나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름은 계속 불리고 불려 서른 번째에 가까워졌지만 우리 이름은 한번도 불리지 않았다. 방송 멘트는 이내 사그라들었다.
  동생은 잔뜩 풀이 죽은 얼굴로 발을 굴리고 있었다. 나는 가방에서 MP3 플레이어를 꺼내들었다. 팝송은 많아봐야 한두 곡이었고 대부분이 뉴에이지 스타일의 잔잔한 곡이었다. 멜로디가 좋다는 이유만으로 생각없이 가져온 곡들이었다. 때문에 곡 제목과 아티스트는 모른채 그냥 하염없이 듣기만 했다. 인터넷 상의 어딘가에서 불법 다운한 곡들이라는 이유로 죄책감을 느끼는 일은 더 이상 없었다.
  동생에게 이어폰의 한 쪽을 건넸다. 동생은 덤덤히 받아들어 오른쪽 귀에 살짝 얹었다. 한시라도 빨리 남쪽으로 내려가야 하는 실정이지만, 우리는 잠시동안 그 자리에서 피아노와 현악의 멋스러운 앙상블에 마음을 내주었다. 음악을 듣는 몇 분 동안만큼은 제발 누군가가 끊어주지 않기를 바라면서 스르르 눈을 감았다.
  어느새 주변이 많이 어스레해졌다. 눈살은 아까보단 많이 약해진 듯 했지만 곧 있으면 어둠이 짙게 깔릴 것이다. 함부로 밖에 나가는건 위험했다. 예상은 했지만 정말 이 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된 것이다.
  동생은 왼쪽 귀에 이어폰을 얹어놓은채 잠들어있었다. 나는 내 귀에 꽂혀있던 다른 한 쪽을 빼서 몸을 살짝 들어 동생의 반대쪽 귀에 조심스럽게 꽂아주었다. 몸이 생각보다 말을 안 들어 순간 넘어질 뻔 했지만 동생은 어느새 깊은 꿈나라에 빠져들어 기척조차 없었다. 배고프면 잠이 안 온다는 말이 꼭 들어맞는건 아닌 듯 했다. 피곤한 건 세 끼 가까이 먹지 못한 나도 마찬가지였다.
  오지의 밤은 한없이 평온하기만 했다. 도시의 밤에 느끼는 고요함과는 또 달랐다. 집에서 잠들 즈음에는 정말 쥐조차 다 죽어버린 듯 조용하다가도 어디선가 차 소리가 간간히 들려오는 정도지만 이 곳에서는 매서운 한기를 품은 바람 소리가 알게 모르게 귀를 계속 간지럽혔다. 새삼 정말 먼 곳까지 와버렸구나 싶어 가슴이 먹먹해졌다.
  하루하루 단조롭기만 했던 일상에 비하면 오늘 하루동안 벌어진 일은 정말 많은 편이었다. 차마 기억도 나지 않는 자잘한 일들까지 포함하면 한 100개 정도는 헤아릴 수 있지 않을까. 하나의 공식처럼 남아있는 루트를 따라 별다른 감흥 없이 탄탄대로를 걸어가던 평상시와 비교하면 오늘 벌어진 일은 우리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그 충격은 제대로 된 이유조차 알려주지 않은 채 우리를 이 자리까지 끌고 내려왔다.
  왜 내려와야만 했을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는데.
  부모님께서는 알고 계셨다. 하루종일 술렁이는 주변 분위기에 이끌려 사람들에게 정보를 캐묻고 다녔던 부모님의 안색은 결코 좋지 않으셨다. 분명 뭔가 안 좋은 일이 벌어진 건 확실했지만 그 실체를 우리는 끝내 알지 못했다. 결국 남은 건 지레짐작 뿐이었지만, 확신한다고 해도 지금 상황에 딱히 큰 도움도 될 수 없는 마당이었기에 그 원인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지는 않기로 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건 일단 최대한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육지의 제일 밑에까지 내려가면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그 곳에서 모든 일의 전말을 알 수 있을 터였다. 부모님도 어디서 내리셨든간에 남쪽으로 향하고 계실테니 이제 우리가 신경써야 할 부분은 우리 둘 뿐이었다. 문득 전화기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물품인지 실감이 났다. 지하철도 아직까지 돌아가고 있는데 그 놈의 통신망은 왜 꼭 필요할 때에 맛이 가버린걸까. 자연스럽게 손이 바지의 왼쪽 주머니로 향했다.
  다운만 받으면 게임도 되고 영화도 볼 수 있는 다재다능한 기기지만, 가장 기본이 되는 통신 기능이 막혀버리니 되는 것보단 안 되는 게 더 많아 감흥이 다 사라져버렸다. 처음에 이걸 두 손으로 들었을 때 지었던 발그레한 표정이 무색할 정도였다.
  버스를 타고 학원을 들락날락할 때면 나는 항상 폰만 이곳저곳 만지작거렸다. 폰이 없던 시절에는 책만 읽었다. 정말 아무 것도 할 게 없을 때는 책 읽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없었는데 그 자리를 폰이 대신하고부터 짬 내서 늘리고 있었던 독서량은 결국 현저히 줄어들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후회 막심이었다.
  가방에서 책을 꺼내들었다. 자기계발서나 명언집은 아니고 근래에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장르 소설 중 하나였다. 멀지 않은 미래의 이야기를 다소 진중한 분위기 아래 다룬 작품이었는데 부지런히 다 읽고 나서 느낀 개운함과 감동은 쉽게 잊을 수가 없었다. 결말까지 가는 과정이 제법 광활한 대서사시를 이루고 있어서 분량이 만만치는 않지만 워낙에 이야기 자체가 흥미진진했고 어느 순간부터 튀어나오는 시사점들이 크게 와닿았던 면도 있었다. 집을 떠나기 전에 충동적으로 선택한 책 치고는 상황이 지금의 우리와 비슷하기도 해서 기분이 조금 묘하기도 했다.
  몇 페이지만 읽다가 잠에 들려고 했던 결심은 두 장을 넘기고 사그라들었다. 잠기운은 알아서 내 신경을 톡톡 건드리고 있었다. 시간은 오후 9시 26분. 잠들기엔 아직 많이 이른 시간이지만 오늘따라 금방 졸려오는 건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잠이 오는 걸 막을 생각이 없었던 나는 책을 펴놓은 그대로 고개를 떨구어 백지장에 얼굴을 의지했다.
  고개를 들었다. 화장실로 달려간 동생이 어느새 볼일을 다 보고 돌아오는 중이었다. 떠날 준비는 이미 끝내놓은 상태였다.
  30분 정도를 앉아있던 끝에 우리는 개찰구 쪽으로 다시 발길을 돌렸다. 역사의 상황은 처음 발을 딛을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내리는 족족 한 사람도 빠짐없이 바로 윗층으로 올라가버리는 바람에 역사는 텅 비어있었다. 반면에 북쪽에서 내려온 열차에는 위아래 따질 것 없이 내리는데 급급한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우리가 열차에 탑승했을 때는 칸 당 10명 남짓만이 남아있었다. 남은 사람들 중 대부분은 고속 버스 터미널과 인접한 역에서 내릴 테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었다.
  수중에 남은 돈은 5천원권 두 장과 카드에 기록된 8천여원 뿐이었다. 고속 열차를 타기엔 어림도 없는 액수였고 고속 버스도 표값이 싸다고 해야 2만원 안팎이었다. 열차 안에 아무도 없었다면 당장 한숨부터 나왔을 것 같았다.
  덜커덩거리는 소리 외엔 아무 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무의식적이었던 들숨과 날숨이 크게 신경쓰이기 시작했다. 동생의 표정은 울적함을 넘어 무미건조함에 가까웠다. 문득 역 로비에 들어섰을 때의 그나마 천진했던 표정과 비교되는 모습에 안쓰러움이 느껴졌다. 나보다도 더 큰 충격을 받고 있을 동생의 심정이 어느 정도일지 충분히 상상이 갔다.
  열차는 지상과 지하를 반복하면서 부지런히 종점으로 달려갔다. 우리는 수도권 전철로 갈 수 있는 최하단의 역까지 내려가려 했다. 종점에 도착한 이후로는 혹시라도 승용차가 있다면 히치하이킹을 하거나 남은 돈으로 택시를 탈 수도 있고, 운이 조금 안 좋으면 걸어서 남쪽으로 내려가게 될 수도 있었다. 어느 하나 확신할 순 없었기에 그 쯤에서 생각을 멈추고 잠시 열차 시트에 몸을 완전히 맡겨버렸다. 열차는 어느새 완전히 지상으로 올라와 달리고 있었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창문 너머의 경관을 주시했다.
  밖에는 흐린 하늘 아래로 싸라기눈이 내리고 있었다. 피난길임을 생각해도 그 모습은 씁쓸하다기보단 오히려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면서 지금의 상황과 지극히도 잘 어울리는 순결한 회색빛의 세상이었다. 파노라마처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부드럽게 넘어가는 그 광경에 나는 한동안 시선을 계속 고정시켰다. 그 시선은 몇 분이 지나고 열차의 다소 큰 흔들림 한번으로 완전히 분산되었다. 어느새 이 칸에 남은 사람은 우리 둘을 포함해서 5명이었다.
  - 우리 이러다가,
  잔뜩 침전된 목소리로 동생이 말했다.
  - 어떻게든 죽게 되는 거 아닐까?
  나는 내 얼굴이 순간 새하얗게 질려가는 것을 느꼈다. 여태껏 동생의 입에서 '죽는다'는 말이 나온 적이 있었던가.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충분히 다 들렸던건지 근처에 앉아있던 한 사람이 우리를 쳐다보았다. 그 한 사람의 시선은 같은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퍽 부담스러웠다. 그 사람은 나와 두 눈이 마주치자 이내 고개를 푹 떨구었다.
  - 살 수 있어. 걱정 안 해도 돼.
  힘들게 입을 뗐다.
  -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살 수 있다고 믿는거야.
  나는 동생 앞에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 지금 이 순간부터는 살 생각만 하자. 그 다음엔 엄마 아빠도 찾고. 만나지도 못하고 죽게 되면 억울하잖아. 그렇지?
  동생의 얼굴은 다행히도 살짝 풀어져있었다. 이어서 오른손을 내밀었고, 우리는 두 손가락을 이어 약속을 의미하는 상징을 만들어냈다. 동생의 손은 미지근했다. 너무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무미건조한 온도였다.
  열차는 종점에 거의 다다른 상태였다. 이미 나머지 3명은 다 내려 어딘가로 떠났고 이 칸에는 우리 둘만 남아있었다. 옆칸에 누가 있을까 싶어 고개를 앞으로 쭉 빼고 둘러봤지만 양 옆칸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내 종점임을 알리는 가락이 흘러나왔다. 우리는 문 앞에 섰다.
  짧은 방황 끝에 결국 여기까지 오고 말았다. 북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아직도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모두가 열차나 버스를 타고 내려가고 있지만 우리는 상황이 조금 더 안 좋았다. 부모님께서는 어디로 가셨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여러모로 악재의 연속이었지만, 포기하고픈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이윽고 열차 문이 열리고……
  ……나는 잠에서 깨고 말았다. 베고 잤던 책의 쪽수도 그대로였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의 개운함은 느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은 아직 꼭두 새벽이었다. 오전 1시 51분. 쉽게 잠에서 깰만한 시간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 때문에 일어나게 된 것일까. 그 답은 바로 알 수 있었다.
  무언가 날아가고 있는 소리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아무도 없는 오지에서 그 소리는 더욱 또렷하게 내 귓가를 스쳐갔다. 굉장히 빠르게 슈웅-하고 날아가는 소리였다. 지금 이 곳의 고요함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소리였다. 나는 실눈을 뜨고 있음에도 살짝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소리는 3~4초 간격으로 계속되어 10번 정도의 두려움을 안겨주고 사라졌다. 하지만 거기서 안심할 수 없었다. 이어지는 다른 소리가 있었다.
  처음에는 지진이 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그 생각을 접을 수 밖에 없었던 건 땅바닥에서 진동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로지 소리 뿐이었다. 그 소리는 마치 드릴 같았다. 그것도 여러 개의 드릴이 동시에 돌아가는 듯한 소리. 그 낯익은 듯 낯선 소리는 근처의 창고에서 휴식 중인 우리에게 위협이 되기에 충분했다.
  동생은 아직까지 작동되고 있는 MP3 덕분에 잠에서 깨지는 않았다. 이대로 위험한 상황이 닥쳐온다면 당장에 깨워야겠지만 소리에 계속 귀기울이고 있던 나는 잠시 망설일 수 밖에 없었다. 그 소리는 메트로놈처럼 일정한 소리를 계속 반복할 뿐, 이곳으로 점점 다가오는 듯한 느낌은 전혀 없었다. 그 소리는 10분을 넘게 반복해 오히려 피곤함만 더욱 가중시켰다. 위험 의식은 점점 사라져갔고,
  내 눈꺼풀은 조금씩 감기어갔다……


***


  문득 집에서 일어났다면 오히려 덜 개운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고에서 맞는 아침이라니. 결코 좋지만은 않은 상황에 그것은 괜한 설렘으로 다가왔다. 겉을 메꾼 나무 판자들 사이로 스며들어온 빛이 순간 신의 가호라도 내려진 듯이 성스러워 보였다면 조금 과장일까. 다소 침울했던 몇 시간 전에 비하면 지금은 그래도 조금 희망적인 편에 가까웠다. 적어도 잠에 푹 빠진 동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만으로도 그나마 속이 좀 놓였다.
  천천히 일어나 문 앞으로 다가갔다. 문고리 밑으로 어제는 차마 보지 못했던 잠금 장치가 보였다. 도어락 같은 디지털 잠금 장치와는 전혀 다른 직관적인 방식이었다. 뾰루지처럼 툭 튀어나온 부분을 아래로 밀어내리니 그 부분이 힘없이 내려가면서 몸체가 돌아갔고 그 부분을 다시 잡아 오른쪽으로 당겼더니 깔끔한 잠금 상태가 되었다. 다시 잠금 장치를 풀고 나는 천천히 문고리를 돌려 잡아당겼다. 바깥이 보이게끔 고개를 내민 나는 순간적으로 움찔할 수 밖에 없었다.
  사람 두 명이 이 쪽으로 오고 있었다. 한 사람은 조금 멀리 뒤쳐졌고, 다른 한 사람은 거의 문 앞에 다 와가고 있었다. 몇 미터 앞에서 다가오는 그 사람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나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급하게 문을 닫아버렸다.
  "Hey, Wait!"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뛰는게 느껴졌다. 외국인이 무슨 연유로 여기까지 찾아온건지 전혀 감이 오질 않았다. 나는 잠금 장치의 뾰루지를 다시 내리고 당겨 문을 잠가버렸다. 힘으로 문을 부수려 들지 않는 이상 함부로 들어오진 못할 터였다. 뒤쳐졌던 사람도 그새 문 앞까지 왔는지 두 사람이 대화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학교에서 몇 번이고 들어왔던 외국어지만 단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몇 마디의 대화가 계속 오가고 이내 누군가가 가볍게 노크를 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다짜고짜 문을 열어주기에는 그들의 등장이 너무도 뜬금없고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곧 들려오는 누군가의 한 마디는,
  "실례합니다."
  우리말이었다.
  "문 좀 열어주세요."
  또랑또랑한 모국어 발음이었다. 뒤쳐졌던 사람이 우리나라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뾰루지를 왼쪽으로 당기고 위로 올려 천천히 문을 열었다. 두 사람과 얼굴을 마주했다.
  "어…… 안녕?"
  오른쪽의 남자가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나는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남자는 반쯤 열린 문틈을 통해 내부의 모습을 잠깐 훑어봤다.
  "여기가 너희 집이니?"
  "아니요."
  "그럼?"
  "그냥 창고 비슷한 데에요. 저희는 그냥 잠시 쉬어갈려고 있는거에요."
  "저희라고 말하는 거 보니까 다른 사람도 있나보네."
  "동생이 자고 있어요. 깨울 생각은 하지 마세요."
  "에이. 깨우진 않을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남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그냥 볼 일이 있어서 그래. 창고라고 했지? 쓸만한 물건이 있으면 가져가려고 하는데 좀 들어가면 안 될까?"
  미심쩍은 면은 있었지만 나는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들어와서 잠시동안 창고의 전체적인 모습을 둘러보기만 했다. 이어서 서랍장과 자루들을 들춰가며 원하는 물건이 있는지 찾기 시작했다. 물건을 하나씩 꺼낼 때마다 들리는 소리가 제법 거슬렸다. 그들은 무언가 괜찮은 걸 찾았다는 듯 꺼낸 것 중에 몇 개를 한 곳에 모아두었지만 나는 그것들이 어디에 쓰이는 물건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구석까지 들추고 있던 그 남자가 뭔가를 발견하고는 다른 서랍을 뒤적거리고 있던 외국인을 불렀다. 그들은 조용히 외국어로 무언가 얘기를 나눴는데,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와중에 딱 하나 알아들은 단어가 있었다. 남자가 손에 들고 있는건 revolver였다. 그는 외국인에게 잠시 비켜보라는 손짓을 했다.
  "작동은 될려나."
  그리고 바닥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나는 내심 불안해졌다.
  "저기요. 그거 안에 총알 있으면 어쩌려고 그ㄹ……"
  그 순간 장내에 굉음이 울려퍼졌다. 텔레비전을 통해 간간히 들어왔던 총소리보다 훨씬 강한 소리였다. 그 소리에 나는 물론이고 쏘는 사람과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까지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속된 말로 간 떨어질 뻔 했다.
  "애 깨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나 이미 깼어, 누나."
  막 깬 듯 가래 낀 목소리로 동생이 말하자마자 나는 고개를 뒤로 휙 돌렸다. 정말로 총소리를 듣고 깼는지 눈을 비비적거리고 있었다. 후우- 한숨이 절로 나왔다.
  "미안해. 그냥 한번 방아쇠 당겨본건데 총알이 있었네. 이거 참고로 여기 서랍에 있었던거야. 아주 구석탱이에 있었어."
  그 말은 이내 옆에 있던 남자의 질문에 그들만의 대화로 이어졌고, 나는 동생 옆에 다가가 무릎을 위로 올리고 앉았다.
  "저 사람들 누구야?"
  "그냥 물건 좀 찾으러 온 사람들이야. 해치지는 않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그렇게 잠시동안 우리는 우리끼리, 그들은 그들끼리 서로 다른 언어를 써가며 대화를 나눴다. 저들이 우리를 해치지는 않을 거라고 일단 말해줬지만 확신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설령 나쁜 의도는 없었다고 해도 지금 여기서 굉장히 위험한 무기를 손에 넣은 이상 경계를 완전히 늦출 수는 없었다.
  "근데,"
  외국인과 대화하던 남자가 문득 우리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너희들 어디 가는 길이었어?"
  "왜요?"
  차갑게 대답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얼떨결에 무미건조한 말투로 역질문을 던져버리고 말았다. 남자의 표정은 방금 전보다 많이 진지해져 있었다.
  "궁금해서 그러는거야. 목적지가 같으면 동행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 남쪽이요."
  "남쪽? 남쪽 어디?"
  "그냥 남쪽이요. 최대한 맨 밑으로 내려가야 돼요."
  "여기까진 어떻게 왔어?"
  "걸어서 왔어요. 1호선 타고 제일 밑에 있는 역까지 내려오고 나서요."
  남자는 대화를 함과 동시에 옆의 외국인에게도 통역을 해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확실히 다른 국적의 사람인데 어떻게 알고 지내다가 여기까지 와서 우리와 만나게 된걸까. 저쪽에서 워낙에 질문 공세였기에 한번 정도는 물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쉽게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아직도 그들 입장에서는 우리에게 물어보고 싶은게 많은 듯 싶었다.
  "이 친구도 궁금한게 하나 있다 그러는데, 부모님은 어디 계셔?"
  "먼저 가셨어요."
  "부모님이 너희들 놔두고 먼저 가셨다고?"
  "저희가 사정이 생겨서 조금 늦게 가게 됐어요."
  부모님이 우리를 차마 데려가지 못했다거나 우리가 부모님을 놓쳐버렸다는 식으로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걱정이 조금 되는 모양인데, 우리한텐 차가 있어. 타고 가면 오늘이나 내일 쯤 남쪽에 도착할 수 있는데…."
  "차 타고 가면 확실히 금방 가겠다. 같이 가자, 누나."
  옆에서 잠자코 앉아있던 동생도 거들기 시작했다.
  "엄마 아빠 빨리 봐야지. 전철에서도 얘기했잖아."
  동생의 눈에 기대하는 빛이 서렸다. 의심을 전혀 하지 않는 듯 했다. 동생의 말을 무시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직도 앞에 서있는 두 사람에게 믿음이 확실히 가질 않았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현재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10시 44분. 한시라도 일찍 남쪽으로 내려갈 필요는 확실히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졌다.
  "꼭 같이 가야만 하는 이유라도 있나요?"
  남자는 "같이 가야 하는 이유"를 소리 없이 되뇌이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왠지 표정 보고 물어볼 것 같다는 생각은 했어. 이유는 간단해. 지금 상황에서 동행자가 있으면 도움이 되는게 많거든. 너희들한테도 그렇고 우리한테도 그렇고."
  남자는 우리 앞으로 와서 한 쪽 무릎을 들고 앉았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고 있지?"
  대답을 요구하는 의미의 손짓이 내 앞을 향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정확히는 몰라요."
  "정확히는 모른다……. 그럼 너는?"
  이번에는 손가락이 내 옆을 향했다. 나는 동생도 당연히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동생은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고?"
  남자가 다시 묻자 동생은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놀란 표정을 차마 감추지 못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어제 화장실에서 어떤 아저씨가 알려줬어."
  '화장실' 세 글자에서 나는 탄식을 내뱉고 말았다. 고속 열차를 타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던 그 역의 화장실이었다. 문득 전철을 타고 종점을 향하던 중에 동생이 불현듯 내뱉었던 '죽음'이라는 단어가 이제서야 제대로 와닿았다. 죽음으로 직결될 수도 있는 일이라면, 역시 전쟁일까.
  "저기."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차부터 타자. 지금 여기서 계속 시간 끌면 안 돼."
  그렇게 말하고 두 사람은 밖에 나갈 채비를 했다. 허름한 보조가방의 입구를 열어 모아뒀던 물건들을 죄다 안에 쓸어담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동생을 일으켜주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누나도 같이 갈거야?"
  동생도 내 표정과 말투에서 불신의 감정을 느꼈던 모양이다. 아직까지도 그 감정이 100% 지워지지는 않았지만, 이미 결심은 선 상태였다.
  "같이 가야지. 빨리 가서 엄마 아빠 만나자."
  동생을 일으켜세우고 가방을 챙겨 바로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에게 신경쓰느라 보지 못했던 바깥 전경이 눈에 확 들어왔다. 결코 맑다고는 할 수 없는 날씨였다. 햇빛이 약하게 땅을 비추고 있었지만 하늘은 칙칙한 회색 구름으로 덮여있었다. 그나마 눈은 완전히 그쳐 이동에 큰 무리는 없는 상태였다.
  "저기 앞에 작은 차 보이지? 그거 타면 돼."
  뒤에서 따라오던 남자가 외쳤다. 그 소리를 듣고 차에 시선을 고정시켜 바로 앞에 서기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눈 앞에서 본 그 차는 나에겐 조금 낯선 차였다. 딱 봐도 꽤 오래 된 구식 차량이었다.
  "여기 뒷자리에 타면 돼."
  남자는 운전석에, 외국인은 조수석에 앉았다. 우리도 이어서 뒷자리에 들어가 앉았다. 차의 작은 체구에 비해 생각보다 불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거 굴러가기는 해요? 아까부터 계속 불안했는데."
  "문제 없어. 좀 오래 타기는 했는데 아직도 멀쩡해."
  남자는 핸들에서 살짝 오른쪽에 있는 구멍에 열쇠를 끼워넣고 돌렸다. 바로 차에 시동이 걸리면서 시트를 통해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그는 이것저것 보조 장비들을 건드리며 말을 이었다.
  "이 차를 8년 전에 샀는데, 샀을 때도 사실상 중고로 산 거였어. 나온지는 아마 20년도 넘었을거야. 근데 뭐 아직까지 쓰는데 무리도 없고 다른 걸로 바꾸기엔 요즘 차들이 너무 비싸서 계속 쓰는거지. 이 차가 좀 작기는 해도 그거 덕분에 연비는 괜찮거든. 간당간당하게 최남단까지는 갈 수 있을거야. 중간에 문제만 안 생긴다면."
  "무슨 문제요?"
  "눈이 많이 와서 완전 쌓였잖아. 저기 고속 열차를 타고 가는 사람은 몰라도 이런 데처럼 사람 잘 안 다니는 비포장도로는 눈 치우지도 않고 그대로 남아있는 곳이 많아. 지금 여기는 어제 탱크가 지나가면서 싹 쓸어버렸으니까 그나마 다닐만한거고."
  나는 창문 너머 땅바닥을 주시했다. 어젯밤에 드릴같은 소리를 내며 지나갔던 다수의 탱크들로 인해 길이 시원하게 트여있었다. 왜 이 쪽으로 탱크가 지나간 것이냐는 질문에 남자는 조금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소규모 군사 기지가 있다고 대답했다. 슬슬 조금씩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차는 비포장도로가 전해주는 불규칙한 흔들림을 그대로 전해주며 달리고 있었다. 옆에서 가만히 앉아만 있는 동생의 눈빛에는 어제와 같은 무미건조함이 담겨있었다.
  "이런 말 해도 될지는 모르겠는데, 그래도 너희들은 정말 운 좋은거야."
  남자가 다시 운을 뗐다.
  "분명히 너희 부모님은 소식을 들으셨어. 북군이 선전포고 했다는걸 어디선가 들으시고 너희들한테도 남쪽으로 내려가라고 말씀하신거라고. 근데 아직도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아."
  "수도권에는 통신망이 다 끊겨버린 것 같았어요. 끊기지만 않았어도 다들 대피할 수 있었을거에요."
  "그렇겠지. 조금 황당한 예상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통신망이 죄다 끊긴 것도 북군 첩자들 때문일거라는 얘기가 있어."
  나는 그 이후로 남자가 하는 이야기를 별다른 대꾸 없이 듣기만 했다. 이번 사건의 원흉에 대한 예상부터 시작해 초면 치고는 조금 지나치게 많은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썰을 듣는 동안 그들이 가고자 하는 최종 목적지도 알 수 있었는데, 그들은 일단 항구 도시로 가서 배를 탈 거라고 했다. 조수석에 앉아있는 외국 친구의 고향으로 갈 계획이라는 것이었다.
  동생은 잠이 부족했는지 두 눈을 감은 채 시트에 몸을 의지한 상태였다. 시도 때도 없이 흔들리는 차체 때문에 또 금방 잠에서 깨지는 않을런지 걱정됐다. 한동안 계속 말이 오갔던 탓인지 차 안은 미적지근한 것보다 조금 따뜻한 쪽에 가까워서 나는 이내 외투를 벗어 다시 동생에게 덮어주었다.
  흔들리는 것만 잘 참는다면 걱정했던 것보다는 훨씬 순탄한 시작이었다. 이대로 별다른 변수 없이 편하게 부모님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지만 왠지 그럴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어왔다. 여러가지 생각이 겹쳐오면서 나로 하여금 불안감을 가중시켰지만, 지금의 나로써는 그저 바라고 바라는 수 밖에 없었다.
  부디 지금의 여정이 머나먼 여정이 되지 않기를.
  뒤이어 나도 시트에 천천히 몸을 맡겼다. 없던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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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기

어.... 일단 주제는 '사랑'이었습니다. 사실 정확한 주제는 사랑이 아니라 ㅅㄹ이었어요. 초성이 몇 개 주어지고 그 중에 하나를 골라 주제를 만들어서 글을 쓰면 되는 거였는데, 저는 막상 쓰고 보니까 주제가 사랑도 아니고 회상도 아니고 전쟁도 아니고.. 좀 중구난방이 되었습니다.

막상 써보니까 '어찌저찌 원하는대로 다 써서 개운하다'는 감정보단 어째 '막 쓴 티 팍팍 난다고 욕 먹으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더 들어서 오히려 찜찜함만 남게 되었습니다. 마무리는 나름대로 끝이자 새로운 시작이라는 의미에서 이야기가 더 이어질 법하게 해놨는데 실제로 나중에 가서 더 쓰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그 때는 부디 긴장감 부여력과 배경 묘사력이 조금만이라도 더 좋아져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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